프랑스의 미술사가 고(故)르네 유이그씨는 “인생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라고 설파했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의 작품세계를 개척해가면서 더 높은 경지의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새로운 작품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온 서양화가 김용숙 화백.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그녀가 1월3일(금)~7(화)까지 신상겔러 에서 초대 시회를 갖는다.
김용숙 화백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분류기법이 통하지 않는다. 추상작품인 것 같은데 구상적인 요소가 있고, 구상 작품인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추상화적인 요소가 묻어나온다. 이렇게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사이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경계가 모호해져 작품의 상당수가 반구상적인 작품들이다. 여기에다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한국화와 서양화 요소가 서로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다. 특히 화가로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회귀본능’이 강해지는 것처럼동양적 요소가 점점 더 강해지면서 색채도 단순해지고 있다. 김용숙 화백은 또 “나는 내가 좋아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도전과 변신을 해온것처럼, 앞으로도 새로운 작품세계를 향해 도전하고 변신을 계속할 것”이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김용숙화백의어린시절 꿈은 문학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어린 소녀의 의지 보다는 그녀 가까이에 있는 화필과 캔버스와 친하도록 그녀를 인도했다. 화가인 오빠가 화실을 운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곳에 들러 붓과 캔버스와 자주 접하게되고 그러다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버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오빠가 그림 그리면서 풍족하지 못한 삶을 사는 모습을 옆에서지켜본 아버지가 “화가는 배고픈 직업인데, 아들 한명만 하면되지, 딸까지 화가가 되는 것은 원하지않는다”고 말하면서 극구 말렸다. 그러나 고교생은 김용숙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캔버스와 색채의 마력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홍익대 섬유학과에 지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대학졸업 이듬해인 1986년 젊은작가 모임 그룹전에 참가 하는 등 섬유공예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김화백은 좀 더 넓은 곳에가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싶어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준비하면서 불어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이번에도 “어린 딸을 외국에 혼자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한국에 눌러 살며 화실을 차려 그림을 그리고, 후학도 지도하며 생활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한번은 꺾을 수 있었지만 두번을 꺾는 것은 부모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였다. 어느날 유학 준비를 위해 불어를 배웠던 홍익대 불문과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교수님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친구의 아들이 한국에 오는데 그 사람이 미술사를 부전공으로할 만큼 미술에 관심이 많으니 한국에 머무는 6개월 동안 데생을 가르쳐주고 불어를 배우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그렇게 해서 6개월간 그림지도를 하고, 그 이후에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2년간의 교제 끝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김용숙화백은 결혼후에도 한동안 섬유공예를 계속하였지만,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활동을 해야했기 때문에 공간적 제약 때문에 포기하고, 순수회화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그녀는 캐나다 몬트리에서 아트리에를 운영하다가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Grier School 초청으로 미국에 와 이 곳에서미술사를 가르치는 남편과 함께 미술을 지도하고 있다. 한편 김용숙 화백은 지난 7월1일 부21일까지 캐나다 퀘백의 오포드 아트 센터 (Centre d’art Orford)에서 개인전을 가져 “서양화에 동양의 정신이 깃든 작품”이라는 현지 화가들과 언론의 호평을 얻었다.
김상일
미주 중앙 일보 기자a